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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lado 2023. 7. 17. 02:32

7월 12일, 국민의힘과 정부가 현재 최저임금의 80%인 실업급여 하한액을 낮추거나 아예 없애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악용하는 사람이 문제라면 악용할 소지를 줄일 수 있게 제도를 촘촘하게 보완하는 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일 텐데 아예 제도를 없애버리겠다고 하니 황당하다. 논리적인 비약일 수 있겠지만, 현재에도 법률의 빈틈을 노려 사법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럼 사법제도를 없애겠다고 주장할 것인가? 이 방안이 통과된다면 다른 복지제도들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다 없애겠다고 주장할까 봐 겁난다.
 
나도 실업급여의 혜택을 받은 적 있다. 1년간 퍼블리셔로 일하다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전직하기 위해 퇴사하고 혼자 공부하면서 6개월 만에 일하면서 번 돈을 다 썼다. 안그래도 이대로 계속 공부해서 개발자로 취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때인데 부모님께 공부할 테니 용돈 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를 계속하기로 하고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하지만 풀타임 일이다 보니 공부랑 병행하기 어려웠고, 개발 공부에 진전이 없었다. 계약이 종료된 후에 다행히 실업급여 수급 자격이 되어 6개월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풀타임 부트캠프를 참여하면서 생활비 걱정 없이 개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6개월 만에 취직했다. 매일 새벽까지 코딩하고 공부해서 간신히 취업할 수 있었는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함께해야 했다면 장담컨대 6개월 안에 취업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직 취직을 못 했거나 개발자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취업 준비하는 2년간은 실업급여가 있었어도 정말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패배감과 무력감, 쓸모없는 나에 대한 자기혐오 등으로 몇 개월간 정말 누워만 있기도 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헤아리는 데에만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떠오를 방법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심연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실업급여를 받지 못했다면 그 심연에서 영영 못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 심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적어도 내 생계는 내가 책임질 수 있다는 감각을 통해 최소한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주 동안 실업급여 논란을 지켜보며 한 영화가 떠올랐다. 2016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이다. 심장병 악화로 실직하게 된 다니엘은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사지를 멀쩡히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심사에서 탈락한다. 심사 결정에 항소하는 동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실업 수당을 신청하려고 하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포기한다. 이 영화는 사회보장제도가 있음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제대로 복지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돌아보기 위해 이 영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 그 누구도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도록 제도를 없애겠다는 시국 때문에 이 영화 얘기를 하게 되니 마음이 정말 착잡하다. 
 
누군가 이건 영화지 않느냐고 묻는다. 극적으로 꾸며진 각본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적절하냐고. 2014년에 '한국판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불릴만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 최인기 씨는 중증 질환인 대동맥류로 인해 근로 능력이 없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생활비와 병원비를 지원받았다. 하지만 이후 국민연금관리공단에서는 '근로 능력 있음' 판정을 내렸고, 최인기 씨는 생계급여를 받기 위해서 일자리를 다시 얻어야 했다. 결국 최인기 씨는 아파트 환경미화원으로 취직한 지 3개월 만에 쓰러져 숨졌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같이 인간적 존엄을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하는 부당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많은 설명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려면 너무 많은 말을 해야 하고, 그러다가 안 하게 됐을 것이다. 그 부당함에 대해 아무도 얘기를 안 하다 보면, 당연한 게 된다. 이 영화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런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호명하는 이름을 만들어 준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멀리 떨어져 있었던 현실의 다니엘 블레이크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 OOO'라고 자신의 인간적 존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다. 2017년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대표가 국민연금공단 건물 벽에 ‘나 박경석, 개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문구를 적었던 것처럼.

삶에 정말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삶은 무의미를 견디는 과정이다.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의미들을 부표 삼고 거기에 몸을 의지하며 간신히 심연으로 빠지지 않고 삶을 유지해 가는 것이다. 나의 인간적 존엄은 나의 부표들이 수면 위에 떠 있도록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인간적 존엄, 그게 뭐가 중요하냐 하는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침해받은 적 없는 사람들뿐일 것이다. 정말 인간적 존엄 같은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은 삶을 연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 불황으로 구조조정과 해고가 많고, 일자리가 적어 이직처를 알아보기 쉽지 않은 시기이다. 이런 때일수록 계획에 없던 실직은 개인에게 큰 상실감을 줄 것이다. 그 상실감은 한 개인이 평생 삶을 일구며 띄워온 모든 부표를 잡아먹을 만큼 클 수 있다. 그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켜줄 사회안전망을 없애는 것은 그를 심연으로 떠미는 일과 같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를 보면,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으니 꼭 한 번 보기를 추천한다(나는 이 영화를 보고 진짜 너무 많이 울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에게는 나의 인간적 존엄을 지켜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꾹꾹 눌러 적으며, 영화의 대사를 인용한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신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참고 기사
 
노동장관 "실업과 실업급여 반복되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산일보. 2023-07-14.
영국인 ‘다니엘 블레이크’의 외침,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일보. 2023-03-07.
"아파서 일 안하겠다" 실업급여 신청한 남성의 최후[이현정의 현실 시네마]. 헤럴드경제. 2023-07-16.
한국판 ‘다니엘 블레이크’ 사건… 국가 배상 소송 나선다. 한겨레. 2017-08-30.